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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살아가며..

추석 국회의원 노래자랑, 그땐 그랬지

 

photo by Justin Higuchi

 

20여 년 전 민족 최대 명절인 추석을 맞아 여야 국회의원 10여 명이 한자리에 모여 숨겨둔 장기를 뽐내고 노래 솜씨를 겨루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1993년의 일입니다.

 

손학규, 박종웅, 오세응, 박세직, 김기도, 박주천 의원 등 당시 민자당 국회의원 6명과

신순범, 제정구, 이철, 정대철, 이석현 의원 등 민주당 국회의원 5명이 그들입니다.

이들 11명은 하루 일정을 반납하고 이색 무대에 올라 잠시나마 서민들의 시름을 달래주었습니다. 

 

심사는 당시 SBS TV 인기 프로그램인  '코미디 전망대'의 '모의 국회' 코너 출연진 김병조, 최양락, 이봉원, 이옥주 등이 맡았는데 심사평 역시 코미디였겠지요. 웃자고 한 일이니까 안 봐도 비디오지요. 순위보다는 일시적이고 간접적이나마 여야 의원들의 화합무대가 마련됐다는데 의미를 두어야겠지요. 정쟁을 벌여도 지금보다는 여유가 있었다는 반증이기도 하구요.

 

신순범 의원은 설운도의 '잃어버린 30년'을 열창해 박수갈채를 받았고

오세응 의원은 수준급 피아노 솜씨와 함께 18번 '이별의 노래'를 불러 성악가를 무색하게 했다는 평가를 얻었고 

이철 의원은 80년대 운동권 가요 '백치 아다다'를 불렀는데 연했답니다.

 


 

경남 삼천포가 지역구인 김기도 의원은 고향 벗들과 함께 열정적인 사물놀이를 선보였고

빈민운동가 출신인 제정구 의원은 양손으로 바닥을 짚고 몸을 지탱하는 묘기를 공개해 감탄이 쏟아졌습니다.

20년간 김영상 대통령의 비서를 지낸 박종웅 의원은 YS의 어투를 똑같이 성대모사해 폭소를 자아냈답니다.

 

이날 박자를 자주 놓치는 의원도 있어 sbs 전속악단이 애를 먹었다니 노래 솜씨가 뛰어난 의원들만 출연 섭외가 된 건 아닌 모양입니다. 그런데 이 정도는 약과이고, 모 의원은 지역구 주민들의 표를 의식해 수위를 넘어선 지역 선전에 열을 올렸다니 어딜 가나 옥에도 티가 있는 법인 모양입니다.

 

이 같은 내용은 1993년 9월 23일 서울 등촌동 88체육관에서 녹화, 그해 추석 다음 날인 10월 1일 SBS TV  추석특집 '노래 실은 의정보고'를 통해 방영됐습니다. 

 

KBS 공채 1기(1973년) 아나운서로 이영혜 아나와 이 특집의 공동 진행을 맡았던 이계진 아나운서는 후일 국회의원배지를 달았습니다. 2004년 5월 제17대 한나라당 국회의원이 된 뒤 2005년부터 3년 동안 한나라당 대변인을 거쳐 2008년 2선(한나라당)의원 자리에 오른 뒤 활발한 의정활동을 펼쳤습니다. 혹시 국회의원 노래자랑 프로의 진행을 맡은 인연으로 그 기(氣)를 받아 금배지를 단 걸까요? 이런 말은 억지고 본인의 기량 덕임을 글쓴이도 압니다.    

 

국회에서 고함을 지르면서 설전을 펴던 이들 여야 의원이 이날만큼은 화기애애했다는 후문입니다. 지긋지긋한 정쟁.올해도 이런 프로그램이 있는지 방송 편성표를 이제라도 살펴봐야겠습니다.      출처: 경향신문 1993년 9월 26일자 17면